석유 산업의 래깅효과 (Lagging Effect) 분석
원유를 구입해서 최종 석유제품이 되는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정유회사가 원유를 수출하는 회사로부터 원유를 구입하기로 했다면 실제 유조선에 선적하기 한두 달 전에 계약을 하게 됩니다. 원유 수출 기업이 생산량을 조절하고 재고를 준비하고 관리할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3월1일에 원유를 구매하고 싶다면 1월 중에는 계약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장기 계약은 또 얘기가 다르긴 한데 간단히 우선 스폿 물량부터 살펴본다면, 3월 1일에 구매하는 것을 1월 1일에 계약을 합니다.
사실 한두달의 기간은 원유 판매 기업, 원유를 구매하는 정유회사 모두 필요합니다.
석유화학 업종은 유연성이 거의 없는데 재고 관리조차도 유연성이 없거든요. 엄청난 크기의 탱크는 짓는 데에도 돈이 많이 들지만 유지비도 많이 듭니다.
그래서 프로젝트 단계에서 적정 재고를 유지하도록 석유제품 저장 탱크 용량이 결정됩니다. 그리고 재고가 남는다고 버릴 수도 없어요.
석유를 바다나 육지에 그냥 버리도록 허가하는 국가는 없습니다. 그래서 생산 공정의 처리량, 수율 관리만큼이나 재고 관리에 애를 먹습니다.
일반 공산품처럼 공간이 모자르다고 급하게 빌릴 공간도 없고 남는다고 처분할 수도 없지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면 "3월1일에 구매를 한다"의 정의는 원유 수출국의 선적항에서 3월 1일에 유조선에 선적한다는 뜻이고 그 순간부터 원유의 소유권은 구매를 진행한 정유회사로 넘어갑니다.
그리고 3월1일 기준 유가를 적용하여 구매 가격이 결정됩니다. 1월 1일 계약 시점에서 3월 1일 거래 가격을 모르는 셈이에요.
판매자, 구매자 마찬가지입니다. 어차피 하루이틀 장사할 것도 아니고 한두 달 사이의 이 간격은 계속 유지되기 때문에 때로는 판매자가 이익을 볼 수도 있고 구매자가 이익을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2월 중하순쯤 되니 갑자기 유가가 상승하기 시작한다고 가정해 봅니다. 정유회사 입장에서는 유가가 더 오르기 전에 빨리 원유를 받고 싶고 원유 수출 기업 입장에서는 서두를 필요가 없겠죠. 그러면 3월 1일 선적 예정 물량을 갑자기 취소해 버리는 깡패짓도 가능하겠군요. 반대로 유가가 떨어지고 있다면 향후 더 싸게 살 목적으로 정유회사가 구매를 취소할 수도 있어요.
판매자와 구매자 모두 유가 등락에 따른 리스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안정적인 계약을 위해 3월1일에 선적하기로 한 물량을 취소할 수 있는 기한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1월1일에 계약할 때 3월 1일에 선적하기로 했다면 취소하고 싶다면 늦어도 2월 1일 전에는 해야 한다, 이런 내용입니다. 날짜는 계약할 때 정하기 나름이겠죠.
물론 계약 파기에 따른 패널티는 또 다른 조항입니다. 판매자, 구매자의 리스크를 모두 감안해야 하고 유연성이 전혀 없는 제품이라 계약 조건도 좀 특이한 게 많죠. 한 달 전부터는 계약 파기 불가하다는 문구를 넣는다면 한 달 뒤를 예측하고 유가 시세 차익을 노리는 지저분한 계약 파기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이제 3월1일에 원유를 싣고 정유회사로 향합니다. 거리에 따라 다르지만 선적 후 도착까지 항해 기간을 2주~1개월 정도 보면 될 듯합니다. 계약 시점부터 보면 2개월~3개월 정도 되겠네요.
3월1일에 출발한 유조선이 3월 15일에 도착했습니다.
하역하고, Tank Certification Test 완료까지 대충 5일 잡을까요.
정유회사의 원유 저장 탱크는 1주일~2주일 정도 여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중간 Buffering 감안하면 유조선 도착 후 상압 증류공정 투입까지 대략 15일 잡아볼까요. 4월 1일이 되었습니다.
4월 1일에 상압 증류공정에 투입하면 제품 나오는 건 순식간입니다. 그날 바로 항공유, 가솔린, 디젤 탱크로 보내질 것입니다. 그러면 각각의 제품 탱크 또한 재고 관리를 위한 Buffer Volume이 있을 텐데 대략 1주일 잡아보겠습니다.
그러면 4월8일이네요. 4월 8일 가솔린을 선적하기로 계약이 되어 있었다면 (이제 정유회사는 판매자이고 또 다른 구매자가 있겠죠), 역시 한두 달 전에 계약을 했을 것이고 원유 계약과 비슷한 과정을 따랐을 것입니다.
석유화학공정은 연속 공정입니다. 원유를 유전에서 퍼올리는 순간부터 파이프라인을 따라, 탱크를 따라, 유조선을 따라, 공정의 장치를 따라 기름이 줄 서서 쭉 이어져 있는데요.
3월1일에 산유국에서 선적된 원유는 중간 과정을 거친 후 4월 8일에 가솔린 제품으로 또 다른 유조선에 선적이 되는 과정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3월 1일에 선적한 원유는 그저 원유일 뿐입니다. 자신의 갈길을 따라 쭉 가면서 가솔린 유조선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이 녀석의 가치는 3월 1일부터 매일 변합니다. 원유와 석유제품 시장 가격이 매일 변하니까요.
4월8일에 선적하는 가솔린의 몸값은 명확합니다. 4월 8일 석유제품 시장의 가솔린 가격입니다.
그런데 4월8일 기준 정제마진을 계산하려면 4월 8일 판매되는 가솔린의 원료 가격, 즉 원유 가격이 필요합니다. 이 가솔린은 3월 1일에 구매하여 (선적하여) 4월 8일까지 왔습니다.
이 경우 원유 가격은 3월1일부터 4월 8일까지, 대체 어느 날짜의 가격을 적용해야 하나요.
더 일반적인 질문, 원유 선적 유조선부터, 정유회사 원유 저장탱크, 공정의 각종 장치에 꽉 차 있는 기름들.. 연속적으로 다닥다닥 붙어있는 액체/기체 덩어리들을 구매 날짜부터 고려하여 어느 지점에 있는 기름은 얼마짜리, 어느 지점에 있는 기름은 더 비싸고.. 이런 게 이론적으로 가능할까요?
회사에서 평가하는 방법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 문제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재고평가라는 항목이 필요합니다. 자세한 것은 너무 기술적이고 또 법적인 문제와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회계상의 재고평가 처리 방법, 그리고 재무제표에 어떻게 반영할 것인가).
배관이랑 장치, 저장탱크에 꽉 찬 제품들은 들여온 시점이 다 다르기 때문에 가치를 매기기 쉽지 않은데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쓰입니다. 월 단위로 회계 처리할 때 해당 월의 평균 가격을 전체 재고에 평균적으로 일괄 적용하는 방법, 그리고 전체 재고량을 알고 있다는 전제 하에 수입되는 양과 판매되는 양을 이용하여 먼저 수입된 것을 먼저 판매하는 것으로 처리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가 선입선출법이 되겠는데 굉장히 까다롭고 복잡합니다. 그래서 전체 재고를 평균 가격으로 일괄 적용하는 방법이 많이 쓰입니다.
원유는 원유일 뿐, 그자리에 가만히 있습니다. 그런데 시장 가격에 따라 제품 탱크와 장치, 배관에 있는 녀석들의 몸값이 들쭉날쭉하네요. 유가가 계속 상승한다면 원유를 구매해서 최종 제품으로 처리되는 사이, 그냥 가만히 있는데도 몸값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장부상으로 돈을 버는 것처럼 보이지요.
유가상승 시기에 정유회사들은 이렇게 제품 가격 상승 이외에 그냥 돈을 법니다. 그리고 이것을 뉴스에서 재고평가이익이라고 하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수정: 일반적으로 보수적 관점으로 접근하기 위해 재고평가이익은 재무상 반영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세상에 가만히 앉아서 돈을 벌 수 있을까요. 공짜는 없는 법이죠. 나중에 경기가 고점을 찍고 하강하면 유가도 자연스럽게 떨어지기 시작하겠죠. 위에서 살펴본 정 반대의 과정이 발생합니다.
가만히 앉아서 장부상으로 돈을 까먹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이를 재고평가손실이라고 합니다. 작년에 정유사들이 대거 적자를 기록한 것은 단순히 정제마진 부진 탓이 아니라 유가 급락에 따른 재고평가손실이 상당 부분 차지했습니다.
정제마진을 계산해볼까요. 위에서 4월8일 기준 정제마진을 계산할 때 제품은 4월 8일에 판매되지만 해당 원유는 3월 1일 자로 계약이 되었어요.
한 달이 넘는 사이 유가가 많이 올랐다면 4월 8일 원유는 훨씬 비쌀 것이고 결론적으로 싼 원유로 비싼 제품을 만든 셈이 됩니다. 물론 재고평가 방법에 따라 선입선출이 아닌 평균 법을 적용한다면 3월 1일~4월 8일의 중간값이 되겠지만 결국 가격차이로 인해 싼 원유로 비싼 제품을 만드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원유를 구입하는 시점과 제품을 판매하는 시점의 시차, 그리고 그 사이의 시장 가격 변화에 의해 발생하는 효과를 래깅효과 (Lagging Effect)라고 합니다. 재고평가와 어느 정도 통하는 면이 있는 개념인데, 결국 실제 공정의 Performance가 아닌 외부 효과라는 점에서 비슷합니다. 래깅 효과는 유가상승 시 같은 제품을 싼 원료로 만든 것처럼 둔갑시켜 주기 때문에 정제마진 개선에 도움을 줍니다. 그러나 재고평가와 마찬가지로 공짜는 없습니다. 유가 하락 기간 중에는 래깅 효과로 인해 정제마진 악화에 부채질을 하게 됩니다.
결론
경기가 활성화되어 유가가 상승하고 정제마진이 상승하면 정유회사의 수익은 개선됩니다. 그런데 정제마진의 래깅효과까지 더해져서 실제 정유회사의 수익은 훨씬 더 상승하게 됩니다 (장부 상 그런 것처럼 보입니다.). 따라서 유가상승 및 정제마진 상승기에는 실제보다 정유회사 수익 및 주가는 훨씬 가파르게 상승합니다. 경기 하락이 시작되고 유가가 하락할 때에는 정 반대의 현상이 나타납니다. 정유회사 수익 악화에 재고평가손실과 래깅 효과까지 더해져서 손실히 훨씬 커집니다 (장부 상 그런 것처럼 보입니다.). 따라서 유가 하락 및 정제마진 하락기에는 실제보다 정유회사 수익 및 주가는 훨씬 가파르게 하락합니다.
결국 조삼모사입니다. 그러나 산업의 위와 같은 특징으로 인해 정유회사 마진과 주가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면 좀 더 재미있는 투자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2021년 1분기에 유가가 많이 올랐죠? 정유회사 1분기 실적 발표 때 래깅효과로 인한 정제마진 개선분이 언급될 것입니다. 이 부분 한번 주의 깊게 관찰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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